나는 가족의 미소와 행복을 담당하는 주부다

밥하기. 빨래하기. 설거지 하기. 청소하기...

좋아서 하는 사람 없겠지만 저는 참 지긋지긋하였습니다.

홀로 우리 두 형제 키우시느라 직장일은 물론 집안일까지 너무 힘드셨던 어머님의 일손을 돕기 위해 어쩜 저의 주부노릇은 어린시절부터 자청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남자의 몸으로 주부 일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식당일을 다니시느라 항상 손발이 퉁퉁 부어 주무실 때조차 끙끙 대시던 어머니. 그리고 어린 동생을 위해서는 제가 살림을 해야 했습니다.

거기까진 뭐 좋았습니다.

주부일 하느라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도, 공부할 시간을 빼앗기는 것도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참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위안했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던 무렵부터 주부의 일은 가도 가도 끝이 없고 해도해도 티 안 나는 일이란 것은 스스로 깨닫아 갔고, 내심 주부의 이름표를 벗어 던지는 날만을 손꼽아 왔습니다.

형편이 좀 나아지면 아니 내가 대학에 들어가면 아니 정말 적어도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면 주부에서 해방 될 수 했겠지 하며 인고해 왔던 십수년.

하지만 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주부도 해내기 힘들다는 아이돌보기 까지 도맡아야 하는 진정한 주부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학업을 마치고 어머니와 장사를 하게 되었기에 시간적 여유도 생겼고, 어느정도 형편도 풀려가고 있어 주부일에 손을 놓아도 되나 싶을 무렵 안타깝게도 주변의 반대에도 일찍 결혼을 했던 동생은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직장일에 바쁜 동생 대신 돌이 채 되지 못했던 조카아이는 둘은 어머니와 제가 돌보아야 했습니다.

아이 분유를 타고, 기저귀를 갈고 우는 아이를 달래고 씻기고 하다보니 청소며 밥하기쯤은 정말 일도 아닌 일이 쉬운 일이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거기에 또 어머님의 관절염까지 심해져 제가 거의 혼자 아이를 보고 살림을 하는 처지가 되자 사는 것이 정말 전쟁 같았습니다.

가게의 매출도 점점 떨어져 갔고, 저는 짜증만 늘어갔습니다.

서른을 넘기고도 연애 한번 변변히 못해 볼 정도로 집안일에 아이 돌보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다 보니 결국 남는 것은 한숨밖에 없었습니다.

남자로 태어나서 왜 주부가 되어야 하나?

결혼도 못했는데 아빠도 아닌 엄마 노릇도 왜 내가 다 해야 하나?

가족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저 혼자 힘들고 고통스럽게 희생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동생과 다툰 날도 부지기 수였습니다.

“지원이가 내 딸이야? 내가 집안 살림 하고 애까지 언제까지 키워야 하는데? 니가 키우던가 아니면 좀 맡겨. 나도 이제 더 이상은 못하겠다.”

하는 형의 성화에 동생은 어린 조카를 아주 늦은 시간까지 유치원에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아이를 씻기지도 못한 채 마루에서 골아 떨어져버린 동생과 유치원에 오래 있는 것을 싫어 하던 조카를 보니 또 마음이 아파 유치원에서 일찍 데려왔다 또 제가 힘이 들어 짜증을 내면 동생이 늦게 데려오기를 한참 반복하며 힘들게 지내다 보니 가족의 사이도 점점 멀어져만 갔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조카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주었고, 사실 아빠보다 결혼도 안한 총각 큰 아빠를 엄마처럼 따르는 조카아이가 너무 예뻐 결혼이 더 하고 싶던 날도 많았습니다.

너다섯살 무렵부터 쓰레기도 치워주고, 정리정돈도 하며 큰아빠와 할머니의 일을 열심히 돕는 조카가 대견 스럽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아이를 키우며 살림을 하는 것은 여전히 힘들고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연애할 시간도 없는 총각 주부였지만 그래도 짚신도 짝이 있었는지 서른을 한참 넘기고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속으로

‘만세! 만세! 만세!’

만세삼창을 외친 건 알콩달콩 결혼을 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역경과 고난의 주부란 이름표를 아내에게 이제 물려줄 수 있겠다는 나쁜 마음도 컸습니다.

하지만 주부의 임무와 책임은 저의 숙명이었나 봅니다.

일 욕심이 많은 아내 또한 회사업무가 항상 저보다 일찍 시작하고 늦게 끝나 주부의 역할은 또 다시 저의 몫이었습니다.

조카는 초등학교에 들어가 이제 어머님이 자주 봐주시지만 여전히 건강이 좋지 못하신 어머님이시기에 두 집안의 살림이 대부분 저의 것이었고 신혼생활이 서서히 지나가면서 저는 악밖에 남지 않은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빨래를 하다 한숨을 쉬고, 청소를 하다 소리를 지르고 우울하고 심난한 마음에 화가 계속 났습니다.

친구 만나 술 한잔 먹을 시간도 없이 왜 이러고 살아야 하나. 나 같이 사는 남자는 아무도 없을거다 싶어 온 식구에게 짜증도 참 많이 부렸습니다.

아내의 임신소식을 안 날.

기쁘고 고맙다는 말을 채 아내에게 하기도 전에

“임신 했으니까 이제 집에 있어. 돈은 내가 벌테니까 살림하고 애나 키워.”

주부 노릇을 하느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던 나를 아내도 알았는지 아내도 별다른 반대 없이 그러마 하였고, 저는 정말 이제는 정녕 기어코 저의 주부생활이 끝났다며 쾌재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아이를 낳은지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단식 투쟁을 불사하며 회사에 출근을 시작하였고.

예. 저는 또 이러고 있습니다.

6개월 된 아들녀석을 키우며 집안일을 하느라 오늘도 가게보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예! 저는 서른넷의 건장한 남자 주부입니다.

주부생활 20여년.

짜증만 내는 못된 주부인 적이 더 많았지만 이제는 가족을 사랑하는 진정한 주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우리 조카 지원이가 분유를 타고 있는 저의 곁으로 조르르 달려 오더니 이 것 저것을 물어 봅니다.

“큰아빠! 쭌이 분유는 어떻게 타요? 몇시간에 한번씩 줘야 해요? 그리고 기저귀 가는 법. 목욕 시키는 법도 알려 주세요.”

대수롭게 않게 분유 타는 법등을 이야기 해 주는데 지원이는 한자도 빠짐 없이 그것을 메모하더군요. 나중엔 의아스러워

“지원이가 아이 키우는 방법을 왜 알아야 하는데?”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 지원이가 말하더군요.

“ 제가 지원이 돌봐 주고 싶어서요. 아빠가 바빠서 그리고 우리 엄마는 먼데 있어서 큰아빠랑 할머니가 저 힘들게 키워주셨으니까 저도 지원이 키워 주려구요. 옆에 같이 있을 수 있는 가족이 돌봐주면 다른 가족들도 걱정 안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잖아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습니다.

할머니보다 제 아빠보다 제 숙모보다 9살 고사리 손으로 큰 아빠의 집안일을 제일 열심히 도와주는 우리 조카 지원입니다. 성심이 착해서 그렇겠지. 어느 때에는 엄마가 없어 철이 일찍 든 건 아닌지 걱정스러울 때도 있었는데 지원이의 행동의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아빠와 숙모가 바쁘니, 큰아빠가 힘드니, 할머니가 아프니 자신이 할 수 있고 도울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냐 하더군요.

가족이니까 누가 하는건지는 상관 없지 않냐는 지원이의 반문에 너무도 부끄러워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인 우리 조카아이도 가족을 위해서 자신이 스스로 하고 싶다는 엄마노릇, 주부노릇을 저는 저만의 희생으로만 생각해 왔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밥 한번 더 하고, 빨래 한번 더 돌리고, 사랑하는 조카와 내 아들을 돌보는 것이 제게는 왜 고통이었을까요?

지원이에겐 그것이 행복이고 즐거움 이라는데 말입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사람. 조금 덜 바쁜 사람. 그리고 곁에 함께 오래 할 수 있는 사람이 저였는데 그래서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더 아름답게 지켜 갈 수 있는 사람이 주부인데 저는 왜 바보처럼 그것을 몰랐을까요?

지원이의 말에 너무도 부끄럽기는 하였지만 지원이의 한마디에 20년의 주부생활이 더욱 행복해 지고 보람차 진 것 같아 가슴이 뿌듯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예쁜 조카 지원이는 벌써 겨울방학을 기다린답니다.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에 가기 싫어서, 놀러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촌동생 준이를 돌보며 집안일을 돕는 엄마이자 주부의 일이 하고 싶어 시간이 많아지는 방학이 기다려 진다네요.

가족과 함께 오랜시간을 보내고, 집안일도 돕고, 사촌동생도 돌보고 싶어 방학을 기다린다는 지원이를 보며 저 또한 가족과 함께 하고 가족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주부란 이름이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깨달아 갑니다.

아마도 아들녀석이 밤새 울거나, 아내가 회식으로 늦거나, 혹은 빨래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때. 또 저녁 찬거리가 영 마땅치 않을 때. 저는 아마 가끔은 또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살림살이를 또 주부의 신세를 한탄하겠지요?

하지만 결코 나만의 희생이란 생각을 하는 일은 가족에게 짜증내는 일은 더 이상은 없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의 곁에서 언제나 함께 하는 아름다운 이름.

빨래와 청소 육아 담당으로 고되기만 한 주부가 아닌 가족에게 미소와 행복을 가져다 주는 소중한 일을 담당하는 주부란 이름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